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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청년들이 우울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 김태형 소장

문통최고 문통최고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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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

80~90년대에 학생운동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이들은 “이 시대에는 왜 거리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개탄하기도 한다. 원래 청년들은 가장 진보적이고 열정적인 세대여서 역사적으로 사회개혁 운동의 선봉대 심지어는 주력부대 역할을 해왔다. 최근의 역사적 시기만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민족운동에서부터 80~90년대의 민주화운동까지 청년학생들은 시대의 선각자, 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하면서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특히 80년대의 6월 민중항쟁은 청년학생들의 선도적이고 치열하며 헌신적인 투쟁에 의해 그 돌파구가 열렸고, 그들의 투쟁에 고무된 기성세대가 대거 합류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부터 청년학생들은 사회개혁 운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항쟁에서는 청년들이 아닌 중장년 세대가 선봉대와 주력부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장 활기차고 낙천적이어야 할 청년들이 우울에 빠져 있다

청년들이 더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그들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울증 환자는 활발한 사회활동은 물론이고 가벼운 운동 심지어는 집 밖으로의 외출조차 버거워한다. 따라서 청년세대가 전반적으로 우울하다면 그들이 투쟁에 참여하거나 거리에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에 의하면 청년들 중에서 32.1%가 우울 위험군에 속한다. 쉽게 말해 청년 10명 중 3명이 우울증 위험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2024년인 현재에는 이보다 상태가 더 나빠졌을 것이다. 아무튼 청년들의 32.1%가 우울증 위험상태라는 것은 청년세대 전반이 우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의 정신질환 비율은 그 집단 전체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년세대가 전반적으로 낙천적이고 명랑하다면 우울증 비율은 2~3% 정도로 매우 낮을 것이지만, 청년세대의 상당수가 우울하다면 그 비율은 10%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청년들이 우울해야만 청년세대의 우울증 비율이 30%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청년기는 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활기차고 열정적이며 낙천적인 시기이다. 청년들은 우울해서는 안 되며 우울할 수도 없는, 우울증과는 가장 거리가 먼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청년들 속에서는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왔다.

 

우울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청년들

청년들은 자신이 우울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이 자기 자신, 개인에게서 찾고 있다. 우울증은 분노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청년들의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공격한다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자기 탓, 개인 탓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들이 우울을 사회 문제가 아닌 개인 문제로 보면서 스스로를 탓하게 된 것은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첫 개인주의 세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화가 시작된 90년대부터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중장년층의 경우 그들이 공동체를 상실한 것은 청년기 이후다. 역으로 말하자면 중장년층은 어려서는 놀이공동체, 청소년기에는 학교공동체, 청년기와 성인기에는 직장공동체나 마을공동체 등을 경험한 세대이다. 물론 중장년층도 90년대 이후부터는 공동체를 상실하고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에게는 공동체 경험이 있기에 여전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으며 사회개혁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공동체를 경험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첫 개인주의 세대

반면에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려서는 놀이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고, 청소년기부터는 개인 간 입시경쟁으로 인해 학교공동체도 경험하지 못했다. 청년기 이후부터는 더더욱 공동체 경험이 없다. 결론적으로 청년세대는 어려서부터 계속 개인 단위로 성장했고 청소년기 이후부터는 치열한 개인 간 승자독식 경쟁, 개인 간 서열경쟁이 벌어지는 무서운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중장년들과는 달리 모든 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동시에 공동체가 중요하다거나 좋은 것이라는 말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청년세대야말로 최초로 한국 사회에 등장한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 고립되어 홀로 세상에 맞서면서 자신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고 서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오늘날의 청년들은 공동체는커녕 친구조차 사귀기 힘들다. 중장년 세대는 중고등학교 시절 나아가 대학 시절에도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의 청년들은 초등학교 시기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평생을 친구 없이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까지도 개인 간 경쟁으로 인해 공동체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청년들이 친구가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나만 빼고는 다들 행복해 보여…

친구가 없다면 우울해지더라도 자기 마음을 털어놓거나 하소연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낯선 사람 혹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사람에게 힘든 마음을 보여줄 수도 없다. 잔혹한 개인 간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청년들은 타인들을 경쟁자 혹은 적으로 간주하며 서로를 포용하기보다는 깎아내리거나 공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인터뷰한 한 기사는 우울한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그들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학생 취재원들은 모두 주변 사람에게 우울한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같았다. 자신의 상황이 약점으로 작용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 취재원은 “다른 사람에게 우울함을 말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두운 면을 외부에 공개해서 약점 잡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나만 우울한가요?”… 정신건강 ‘빨간불’ 켜진 청년들, 『국민일보』, 2024년 11월 23일)

청년들은 우울하면서도 남들한테 우울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친구가 없는 청년들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SNS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온라인 관계에서 대안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SNS에는 자신의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행복을 전시하는 청년들 – 현실에서는 이를 ‘가면 우울증’이라고 한다 - 이 많기 때문에 더 우울해질 뿐이다. 그 결과 청년들은 오직 나만이 우울하고 남들은 다 잘 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거대한 사회 앞에서 개혁의 꿈도 못꾸는 무력한 개인

청년들은 개인주의 세대여서 세상을 개인(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며 매사에 자기 탓을 하는 편이다. 반면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적으며 사회개혁 의지도 박약하다. 여기에 더해 개인으로 고립되어 살아가기에 청년세대는 무력감이 심하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이지만 개인은 무력한 존재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룰 수 있고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고 투쟁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존 사회에 잘 적응하여 최대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사회가 병들어 있더라도 개인은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한 개인은 거대한 사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과 불행이 병든 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각을 갖기 힘들다. 설사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나 혼자서 뭘 어쩌라고?”라고 읊조리며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청년들의 합리성에 주목해 기본직업 등 공동의 목표 제시해야

오늘날, 청년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 우울하고 무력해서다. 청년들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신자유주의의 파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것에 굴복한 기성세대에게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이 과거에 비해 더 우울하고 무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대단히 합리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은 공포형 보수 – 극우세력에 대한 공포로 인해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극우보수를 비합리적으로 지지한다 – 인 노인 세대와는 달리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년들의 합리성(손익계산)이 공동체가 아니라 주로 개인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노인 세대와 같은 ‘묻지마 보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청년들을 다시 청년답게 살게 해주고, 그들이 거리로 나오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모든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기본소득과 기본직업 – 국가가 청년들의 직업이나 일자리를 책임지고 보장하는 제도 – 을 예로 들 수 있다. 공동의 목표는 내 문제가 곧 모두의 문제라는 공동체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각자도생이 아닌 다른 길, 즉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청년들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곧 미래이다. 청년세대의 우울과 무력감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을 시급히 끝장내고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의 미래인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소장님 진짜 분석 정확하게 하시네요. 이래서 학자가 필요한가 봅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청년들은 초등학교 시기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평생을 친구 없이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까지도 개인 간 경쟁으로 인해 공동체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청년들이 친구가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거 너무 내 얘기고... 초등학교 때 친구 못 사귀니 지금까지도 친구가 없는ㅜㅜㅜ 이야 소장님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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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우울한 일이 많은걸요
24.12.0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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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통최고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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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sugar
ㅠㅠㅠㅠ 백만번 공감합니다
24.12.0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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