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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한겨레 사설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됐나

문통최고 문통최고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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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그러더군요. ‘나는 그냥 사람이고 싶은데, 페미니즘이 자꾸 나를 남자로 부른다’고요.”

몇 년 전, 청년 남성들이 왜 그렇게 페미니즘을 싫어하는지 토론하던 중 들은 이야기다. 이후로 이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니까 한국 남성을 ‘남자’로 각성시킨 것이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뜻인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남자들은 ‘보편인간’이고자 했다. 그들이 ‘조센진’에서 벗어나 ‘보편인간’으로 자리잡기까지 가부장제는 열심히 움직였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를 쓰고, 산업화에 맞춰 ‘남성다움’의 의미를 재정립했으며, ‘정상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성 가장의 역할을 구축하면서, 제도적·상징적으로 남성의 경제적 지위를 안정화했다. 그 노력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들이 갑자기 그들을 ‘한남’(한국 남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 때부터다. ‘보편인간’(Man)에서 ‘한국 남자’(men)로의 추락. 사실 이건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계속해오던 짓이기도 했다. “개념 없음이 한국 여자들의 종특”이라며 ‘된장녀’니 ‘김치녀’니 온갖 멸칭을 붙여가며 여자들을 찍어 눌러왔던 이들이 거센 반격에 맞닥뜨린 것이다. 짓밟을 땐 자신의 성별을 굳이 인식할 필요가 없었지만, 짓밟힐 땐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방어의 언어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남자’로 인식하고, 그 정체성을 옹호해야만 하게 된 순간, 남자들은 남성 내부의 차이를 급진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억울한데,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기득권임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문재인 정부 당시 페미니즘, 조국 사태,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 논란, 코인 규제 등 여러 갈등의 연쇄 속에서 ‘20대 개새끼론’에 대적할 만한 ‘586 개새끼론’이 등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당신들은 다 누려놓고?”의 정서가 자리잡았다.

“이게 특별히 청년 남성의 문제인가? 역사적인 폭력의 현장에 남자가 없었던 적이 있었나?” 지난 서울서부지법 폭동을 두고 나온 이 논평은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는 그저 지금껏 반복돼온 “남자는 원래 그래”(Boys will be boys)의 변주에 불과하다. 폭력 행위의 동기를 ‘남성적인 것’으로 자연화하는 오류로 쉽게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 폭력성에 ‘남자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기보단, ‘남자로 각성하는 과정’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어긋난 정체성 정치에 있다.

그래서 글 좀 쓰고 말 좀 한다는 사람들이 그간 쉽게 손가락질해온 것처럼 정체성 정치가 연대를 불가능하게 해 신자유주의적 자기 착취를 지속시키고 새로운 권위주의를 부상시킨 만악의 근원인가? 이 원죄는 모두 정체성 정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에 있나?
2020년대에 이르러 ‘정체성’이라는 정치 운동의 거점은 더는 소수자 운동이나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1970년대 이후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에 맞서고자 했던 소수자 운동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이제 정치적 자원으로서의 정체성은 “나야말로 ‘우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무대에서 빛나는 주인공이 됐다. ‘남태령 대첩’에서처럼 진보적인 소수자 운동이 정체성 정치를 발판으로 연대의 정치를 모색하던 바로 그 순간에, 극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그러쥐었다. 중국인을 간첩으로 몰고, 이성애 ‘정상가족’을 부르짖으며, ‘진짜 여자’의 권익을 주장하는 등의 극우 레토릭은 ‘단단하고 건강한 정체성’이라는 만들어진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 안에서 등장한 진보적 가치가 반동이 되는 것은 정체성 개념만의 문제는 아니다. “본디 혁명 문화에서 강조된 ‘국가’와 ‘애국’의 가치,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 특권에 대항해 부르주아가 요구한 ‘명예’와 ‘노동’의 가치, 임금 착취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의 ‘권리’와 ‘노동’의 가치, 시민 평등권의 수호로서 ‘법과 권리’의 가치”(나탈리 하이니히, ‘정체성이 아닌 것’, 23쪽) 등 많은 것이 보수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그러므로 정체성 정치만을 유독 이미 반동이었다고 단순하게 평가할 순 없다. 중요한 건 정체성 정치가 구성되는 맥락이자 실천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갈리아의 등장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라인 마초 문화와 그 언어를 정확하게 습득, 체화하고 있었던 한국 여성이 ‘여자’로 각성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봤다. 그 정치적 각성은 ‘김치녀’에 대해 ‘한남’으로 응수하는 미러링의 형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혐오에 혐오의 수사로 받아치는 것이 옳았을까?”라는 질문이 여전히 페미니스트들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정당한 평가일까.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을 내놓기 전에, 극우 남성들의 급진화된 정체성 정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보자.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는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그에 따른 여자들의 각성이 남자들의 남성 정체성 각성으로 이어진 건 사실이지만, 남자들의 각성이 메갈리아와 ‘함께’ 시작되진 않았다는 점이다.

기억들 하시겠지만, 성재기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2006년 ‘남성연대’라는 단체를 만들고,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야말로 약자’라는 담론을 최초로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2013년, 그는 단체 운영 자금을 모으겠다며 한강에 투신했다 불귀의 객이 됐다. 1990년대까지 ‘젠더’의 관점에서 불평등과 부정의를 다루는 ‘젠더 문제’는 언제나 ‘여자 문제’였다. 그런데 한국이 아이엠에프(IMF)를 겪고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로 진입해 생존을 위한 경쟁이 고조되기 시작한 21세기 이후, 드디어 ‘남자 문제’가 된다. 경제권을 바탕으로 ‘인간다움-남자다움’을 규정한 사회에서 (현실이건 신화건 간에) 경제적 몰락이란 ‘보편인간-남자’의 몰락으로(만) 받아들여졌던 탓이다. 성재기는 이런 변동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시기에 온·오프라인을 가릴 것 없이 ‘여자 때리기’가 격화된다. 그리고 단단한 남성 약자 정체성을 구성하는 남성들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 그 서사에서 가장 강력한 플롯은 ‘박탈’이었다. 내 아버지는 가졌지만, 586 남자들은 누렸지만, 그리고 지금 동시대 알파걸들이 휘두르고 있지만, 나에게 없는 그것. 내가 부당하게도 박탈당한, 바로 그것. 그것 때문에 나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선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세간의 평가처럼 메갈리아가 과격해서 남성 폭력을 불러온 것이 아니다. 거꾸로 남성 폭력이 페미니즘 대중화 물결과 메갈리아의 등장을 촉발했다. 다만 여성들이 ‘노’(No)라고 말하기 시작하자 남성 폭력과 여성 저항은 상호 간섭하며 서로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 서울서부지법 폭동에 ‘남자로 각성하는 과정’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건 의외로 희망적인 판단이다. 어떤 각성의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남자들 역시 완전히 다른 입장에 설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남’이라는 단어와 마주한 순간 그에게 남자다움의 신화를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남성 페미니스트가 된 이도 있었다.(왜 아니겠는가?) 또한, 이것은 내가 지난 10년 동안 메갈리아 미러링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안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여성혐오와 그에 기반한 차별과 폭력을 폭로하기 위해 바로 그 혐오의 형식을 빌리는 것, 이는 때로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쾌락과 결합한 혐오의 실천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미러링 이후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트랜스젠더 배제의 목소리가 강화되는 흐름을 보며, 그것이 저항의 형식 탓은 아니었는지 고민하게 됐다. 물론 미러링이라는 전략만을 탓하기엔 우리의 투쟁이 놓인 한국 사회의 토양 자체가 이미 지독하게 불평등하고 타인 혐오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여자로 각성’하는 정치적 과정 이후 모두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다. 페미니즘 내부의 싸움이 치열해진 건 이 덕분이다. 중요한 건 정체성의 각성이 다양한 결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단칼에 결정 나는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다. 각성은 시간의 지속 속에서 되풀이되고, 그 과정은 꽤 드라마틱하고 또 지난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돼간다.

 

나는 우리가 각성의 토양을 함께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무모한 도전과 처절한 실패가 허락되는 유연한 정체성의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꿈꾼다. ‘남자다운 남자’와 ‘진짜 여자’라는 짐짓 단단해 보이는 정체성의 신화적 모델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 말이다. 한 번 실패하면 나락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이런 모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실망스러운 글입니다. 한겨레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됐나? 싶을 정도로. 한겨레는 기사 걸러내는 시스템 좀 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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