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도 못 벗어난 국개론
““심판인 여러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와 유일한 희망은, 국가를 위해서도 유일한 희망인바, 바로 여러분이 옛날부터 지니고 있었던 고결한 동정심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무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국가에 만연한 잔인함이 여러분의 마음도 인정사정없이 냉혹하게 만들었다면, 분명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만, 심판인 여러분, 모든 게 끝입니다. 이런 끔찍한 야만 상태에서 살기보다 차라리 짐승과 사는 게 나을 것입니다.”
-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변론」 150장, 김종영(2020), "키케로의 수사학과 후마니타스(Humanitas) -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변론을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제목만 보면 키케로가 국개론자였다는 오해를 할 수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그렇게 해석될 만한 재밌는 구절이 있길래 써 보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였던 키케로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최고 권력자를 향해 도전장을 내던졌습니다. 공화정 말기의 보수파 거두이자 악명 높은 공포정치가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 주인공이었지요. 키케로가 법정에서 변호한 피고인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는 사법살인의 희생양으로 점지된 제물이었고, 그 원고측에 해당하는 인물인 가이우스 에루키우스는 술라의 측근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세가들을 뒷배로 두는 재판에서 변호를 자처하려는 바보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이 신참 청년 변호인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같았으면 청문회 스타감이지요.
키케로의 연설문 가운데 고전이 아닌 것이 없고, 라틴어의 아름다움을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이 없으나, 그의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변론」은 그가 정치인으로 원숙하기 이전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수사학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변론에서 키케로는 철저한 설계 하에 다양한 말하기 전략을 사용하는데, 특히 재미있는 것은 그 중 심판인들을 압박하는 위의 장면입니다. 타락의 극을 달리는 원고 측의 농간으로 무고한 피고인이 고초를 겪고 있으며, 심판인들이 이를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심판인들이 판결을 잘못하면, 로마가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한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청중을 효과적으로 겁박하는 셈이지요. 당연히 진지하게 국개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판을 까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시민을 하나로 묶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키케로처럼 세태를 비판한다는 것은 때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저 변론을 들은 청중들 가운데엔 '그럼 우리가 짐승이란 말이냐!' 하고 뜨악한 이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에요. 일종의 국개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표현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종착지가 감정의 표출인 것으로 끝나는 대신 명확한 목적의식의 실현을 향해 흘러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억울한 피고인을 구해낸다는 것이 그렇고, 더 멀리는 당시 혼란상의 중심에 있던 술라의 전횡을 막아낸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그러한 목적의식이 명확하며 민중 그 자체에 대한 멸시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서생의 문제의식이 실질적 해법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당신들이 이 청년을 구하지 않는다면 개돼지다'와 같은 수사라고 해도 소명을 달성하는 수단이 됩니다.
키케로와 같은 뻣뻣한 애국자는, 바로 그 때문에 시민들을 위하여 시민들 그 자체를 비판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그 때부터는, 그것은 평범하고 저속한 국개론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배격해야 할 국개론'과 '비판적 의견' 사이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향후의 생산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키케로의 연설 전문에 딱 저 부분까지만 있었다면 결과는 처참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들과 더 나은 길을 찾고자 하며 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그들을 비판했습니다. 민주정의 시민이라면 이러한 키케로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거나 정세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실망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고, 때로 심한 말로 동료 시민들을 원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에게 다시 희망을 주고 정치의 전선으로 이끄는 것은 '실망하지 마라'고 명령하는 일이 아니라, '실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일일 것입니다.
샤츠슈나이더의 유명한 말만큼 국개론에 대한 명료한 비판은 없을 것입니다. "학자연하는 이들이 시민의 자격을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삔또가 상해서 국개론이 마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임이 분명하며, 다행스럽게도 영구히 사람들을 벌레 취급하려 할 정도로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다지 날 선 비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민중을 개와 돼지나 마찬가지인 축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으로 화가 난 것 뿐이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해요." 한 마디면 결국 향상심을 찾고 돌아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결국 정당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의연히 그 안에 참여해야 한다는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기만 한다면, 설마 단시간의 슬픔을 견디지 못할까요. 우리가 일시적 국개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자유일지언정, 저는 미움을 표현하기 전에 "그래도 그렇지." 한 마디를 먼저 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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