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 리뷰(3) - 경기 2
92년 대선 마지막 편 올려봅니다. 경기도의 전체적 결과는 지난번에 올려드렸으니까
여기서는 당시 서울과 가깝고 어느정도 위성도시화가 진행되었던 도시들을 몇 군데 골라봤습니다.
1. 수원시
구시군명 | 선거인수 | 투표수 | 후보자별 득표수 | 구시군명 | 후보자별 득표율 (%) |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계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
수원시권선구갑 | 126,297 | 100,058 | 33,307 | 30,661 | 24,892 | 8,059 | 98,605 | 수원시권선구갑 | 33.77 | 31.09 | 25.24 | 8.17 | |
수원시권선구을 | 109,336 | 86,877 | 31,000 | 24,179 | 22,028 | 7,477 | 85,875 | 수원시권선구을 | 36.09 | 28.15 | 25.65 | 8.7 | |
수원시장안구 | 213,603 | 171,635 | 60,555 | 49,140 | 42,572 | 14,138 | 168,997 | 수원시장안구 | 35.83 | 29.07 | 25.19 | 8.36 | |
합계 | 449,236 | 358,570 | 124,862 | 103,980 | 89,492 | 29,674 | 353,477 | 합계 | 35.32% | 29.42% | 25.32% | 8.39% |
- 당시 수원은 경기도 최대도시이자 경기도 표심의 방향계 역할을 했습니다. 다만 지금과는 다르게 외지인 유입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고 외려 토박이 비율이 높아서 전반적으로는 보수정당이 우세한 지역이었죠. 이 때는 권선구, 장안구 2개 구가 존재했는데 후에 팔달구, 영통구가 분구하면서 지금의 수원 4개구가 완성된 겁니다.
- 전반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권선구 갑에서는 YS-DJ 양자 모두 30%를 넘기며 상대적으로 접전이 벌어졌는데요, 저 지역이 지금의 권선구 서부 지역이 거의 다 들어갔죠. 반대로 지금의 팔달구, 그러니까 화성 안쪽 원도심의 비중이 높은 권선구 을은 이때도 수원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 의외로 정주영 후보가 수원에서 25% 이상을 득표하면서 김영삼-김대중의 표가 상대적으로 좀 적게 나온 감이 있습니다. 수원이 보수적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민자당에 일방적으로 표를 주지는 않았던 당시의 묘한 표심을 보여주는 자료죠. 참고로 당시 수원시 전체 의석이 3석이었는데 민자당 2석, 국민당 1석이었던 만큼 이 결과가 아주 우연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다만 의외로 정주영 표가 가장 적게 나온 곳은 지역구 의원이 통일국민당 소속이었던 장안구였다는게...)
2. 성남시
구시군명 | 선거인수 | 투표수 | 후보자별 득표수 | 구시군명 | 후보자별 득표율 (%) |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계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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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수정구 | 182,881 | 149,201 | 45,415 | 64,714 | 25,866 | 9,230 | 147,320 | 성남시수정구 | 30.82 | 43.92 | 17.55 | 6.26 | |
성남시중원구 | 180,646 | 146,577 | 44,971 | 62,339 | 26,657 | 8,550 | 144,499 | 성남시중원구 | 31.12 | 43.14 | 18.44 | 5.91 | |
성남시분당구 | 53,165 | 44,808 | 18,505 | 13,235 | 9,003 | 3,173 | 44,446 | 성남시분당구 | 41.63 | 29.77 | 20.25 | 7.13 | |
합계 | 416,692 | 340,586 | 108,891 | 140,288 | 61,526 | 20,953 | 336,265 | 합계 | 32.38% | 41.72% | 18.30% | 6.23% |
- 이 떄의 성남시는 지금과는 다르게 분당신도시가 갓 입주를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서현동 시범단지 입주가 1991년 9월이었으니 갓 1년이 넘은 상태였죠. 그러다보니 분당구는 표 자체가 그리 많지를 않았고, 수정구와 중원구는 5년 전에도 그랬듯이 경기도에서 김대중 후보의 표를 상당히 받쳐주는 포지션이었습니다.
- 당시 김대중 후보가 성남시 전체에서 40%를 넘겼는데, 그 중에서도 수정구와 중원구는 43%를 넘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김대중 우세 지역중에 43%를 넘긴 곳은 많지 않았던걸 감안하면 성남시의 표심이 확실히 예나 지금이나 민주당세가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분당구는 비록 적은 표본이지만 거의 서울 송파구/양천구 갑과 거의 비슷한 득표율을 보여주면서 이떄부터 보수 강세지역으로 굳어질 것을 예고했다고 보면 될겁니다.
투표구명 | 후보자별 득표율(%) | ||||
민자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
계 | 41.63% | 29.78% | 20.26% | 7.14% | |
이매동 | 40.37% | 32.05% | 18.78% | 7.63% | 이매1동 |
분당동 | 41.83% | 31.22% | 18.89% | 7.05% | |
서현동 | 43.09% | 27.75% | 20.51% | 7.45% | 서현1동 |
초림동 | 41.12% | 32.45% | 18.33% | 6.74% | 수내1동 |
판교동 | 38.85% | 29.56% | 24.40% | 5.72% | |
금곡동 | 41.08% | 22.53% | 30.11% | 5.08% | |
운중동 | 37.73% | 28.73% | 25.34% | 6.87% |
- 위의 표는 분당구만 따로 빼서 내본 결과인데, 참고로 여기서 판교동, 금곡동, 운중동은 개발이 안된 그린벨트 지역이니 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때나 지금이나 서현1동, 수내1동은 분당에서 보수세가 가장 강한 동네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힙니다. 다만 분당동은 이 때 이후로는 딱히 보수가 유달리 더 강한 지역은 아닙니다.
3. 부천시
구시군명 | 선거인수 | 투표수 | 후보자별 득표수 | 구시군명 | 후보자별 득표율 (%) |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계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
부천시중구갑 | 120,898 | 97,463 | 31,447 | 39,209 | 18,084 | 5,961 | 96,143 | 부천시중구갑 | 32.7 | 40.78 | 18.8 | 6.2 | |
부천시중구을 | 110,578 | 87,968 | 28,206 | 34,041 | 17,535 | 5,686 | 86,719 | 부천시중구을 | 32.52 | 39.25 | 20.22 | 6.55 | |
부천시남구 | 214,846 | 174,142 | 59,234 | 63,426 | 34,443 | 12,439 | 172,139 | 부천시남구 | 34.41 | 36.84 | 20 | 7.22 | |
합계 | 446,322 | 359,573 | 118,887 | 136,676 | 70,062 | 24,086 | 355,001 | 합계 | 33.49% | 38.50% | 19.74% | 6.78% |
- 부천시 또한 김대중 후보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부천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대략 5% 정도를 앞서며 승리를 거뒀는데, 특히 지금의 부천시 갑(구 원미갑)/정(구 오정) 선거구에 해당되는 중구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반대로 지금의 을(원미 을)/병(소사)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기는데는 성공했습니다.
- 참고로 이 당시 중동신도시는 아직 입주도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인데다 원도심하고 경계가 모호한 탓에 따로 표심을 나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어 별도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4. 안양시
구시군명 | 선거인수 | 투표수 | 후보자별 득표수 | 구시군명 | 후보자별 득표율 (%) |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계 | 민주자유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통일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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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만안구 | 190,308 | 152,720 | 53,118 | 53,075 | 31,109 | 11,303 | 150,844 | 안양시만안구 | 35.21 | 35.18 | 20.62 | 7.49 | |
안양시동안구 | 158,929 | 129,084 | 46,246 | 44,660 | 25,748 | 9,493 | 127,821 | 안양시동안구 | 36.18 | 34.93 | 20.14 | 7.42 | |
합계 | 349,237 | 281,804 | 99,364 | 97,735 | 56,857 | 20,796 | 278,665 | 합계 | 35.66% | 35.07% | 20.40% | 7.46% |
- 안양은 여기서 다루는 도시들 가운데 가장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만안구나 동안구나 둘다 접전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당세가 어느정도 있었던 만안구가 더 치열했습니다. 다만 지금과는 다르게 만안구가 그렇게 민주당 우세지역은 아니었던지라 2곳 모두 김영삼 후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이와 별개로 이 당시 만안구의 국회의원은 40대 재선 국회의원으로 인지도를 한창 올리고 있었던 이인제였습니다. 이인제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 최연소 노동부장관을 차지하면서 급부상했고 1995년에는 급기야 민선 초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기에 이릅니다. 그런 그가 5년뒤 대선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줄은 이때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투표구명 | 후보자별 득표수 | |||
민자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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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35.79% | 36.92% | 17.88% | 7.89% |
부흥동 | 36.48% | 37.34% | 18.05% | 7.05% |
평촌동 | 33.13% | 37.64% | 18.15% | 8.62% |
범계동 | 38.24% | 35.49% | 17.32% | 8.08% |
- 여기도 당시 평촌신도시가 조성중이었는데, 이 무렵에는 유권자 수가 35,000여명 수준이어서 유의미하게 보기는 조금 애매하긴 합니다. 다만 입주가 진행된 동네들만 놓고 보면 오히려 김대중 후보가 표를 은근히 얻었습니다. 비록 작은 표본이지만 분당하고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그 다음 대선에서 평촌신도시만 놓고 보면 이회창 후보가 승리했죠.(사실 일산, 평촌이 지금같이 민주당이 좀 더 우세하게 된 건 생각보다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5. 과천시
투표구명 | 선거인수 | 투표수 | 후보자별 득표수 | 투표구명 | 후보자별 득표수 | ||||||||
민자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계 | 민자당 김영삼 |
민주당 김대중 |
국민당 정주영 |
신정당 박찬종 |
|||||
계 | 49,273 | 40,109 | 16,268 | 11,419 | 8,077 | 3,466 | 39,798 | 계 | 40.88% | 28.69% | 20.29% | 8.71% | |
중앙동 | 7,027 | 5,663 | 2,510 | 1,390 | 1,179 | 489 | 5,634 | 중앙동 | 44.55% | 24.67% | 20.93% | 8.68% | |
갈현동 | 9,313 | 7,592 | 2,919 | 2,300 | 1,524 | 705 | 7,542 | 갈현동 | 38.70% | 30.50% | 20.21% | 9.35% | |
별양동 | 11,679 | 9,513 | 4,176 | 2,476 | 1,842 | 850 | 9,465 | 별양동 | 44.12% | 26.16% | 19.46% | 8.98% | |
부림동 | 10,097 | 8,300 | 3,598 | 2,205 | 1,547 | 789 | 8,266 | 부림동 | 43.53% | 26.68% | 18.72% | 9.55% | |
과천동 | 6,156 | 4,969 | 1,702 | 1,797 | 906 | 362 | 4,864 | 과천동 | 34.99% | 36.94% | 18.63% | 7.44% | |
문원동 | 5,001 | 4,072 | 1,363 | 1,251 | 1,079 | 271 | 4,027 | 문원동 | 33.85% | 31.07% | 26.79% | 6.73% |
- 과천은 1987년 대선에서도 김영삼이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1위를 차지한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강남과 유사한 표심이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92년 대선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 과천이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은근 동별 차이는 뚜렷하게 드러났는데요, 특히 정부청사가 속해있고 아파트 위주 동네인 중앙동과 역시 아파트가 대다수인 별양동과 부림동에서도 김영삼 후보가 43~44%의 꽤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반대로 아파트와 일반 주거지가 혼재된 갈현동과 아파트가 거의 없다시피한 문원동과 과천동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꽤 선전했습니다. 다만 이 2동은 인구 자체가 많은 편이 아니어서 열세를 완전히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이제 다음부터는 1997년 대통령 선거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