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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유희열과 표절논란에 대한 생각들 - 김영대 평론가

문통최고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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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2022년 10월호

사실상 지상파 유일의 음악전문프로 ‘유희열의 스케치북’ 폐지. ‘백분토론’에까지 진출하며 온오프를 뜨겁게 달군 표절시비는 이렇게 허무한 결론을 맺었다. 새로운 이슈들이 빠르게 기존의 이슈를 덮고 또 덮는 현대사회에서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물론 나름의 파장도 있었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던 누군가의 청춘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표절시비를 제기한 채널들은 예외없이 흥했고, 우리가 아는 수많은 ‘명인’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재평가’ 되는 중이다. 누군가는 필요한 문제제기였다고 말한다. 건강한 대중음악신을 위해 ‘각성’의 충격파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수긍도 되지만 답답함도 느낀다. 90년대 중반 이후 평단에 몸을 담아온 ‘고인물’로서 애초에 이 문제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거라 생각해본적도 없거니와 대중음악 신의 병폐가 이같은 방식을 통해 해결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일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평론가들 포함해 음악계의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침묵’을 했기 때문에 이 사태가 벌여졌고 나아가 ‘괴물’을 키웠다는 의견엔 동의할 수 없다. 평단이 이 문제에 유독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비겁하거나 친분이 있는 뮤지션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이 표절문제가 단순히 결론내거나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중음악 평론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90년대 이래로 수많은 표절시비와 논란이 있었고 그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지만 표절에 대한 명쾌한 기준이나 방지대책 같은 것은 단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서 평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원론적인 입장의 반복과 확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표절에 대한 ‘기준’과 ‘대책’이 명쾌하게 나올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오히려 간단할 수 있다. 애초에 예술에서 창작과 모방 혹은 표절의 경계는 그렇게 애매한 것이고, 그 애매함을 다루는 ‘담론’ 역시 다양하고 복잡할지언정 명쾌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의도’가 수반된 ‘유사함’을 근거로 표절을 판단한다. ‘표절했음이 틀림없다’는 의도에 대한 판단으로, 이것이 물론 법적인 조치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이들이 유희열의 음악을 문제삼았던 이유도 듣기에 비슷하고 본인도 표절의 의도를 명백히 보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름 명쾌한 논리인 듯 싶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이 같은 논리에 의하면 우연한 일치는 불행일 뿐 표절이라 말하기 어렵지만 정작 우연한 일치야 말로 우리가 법적으로 표절을 가장 완벽하고 명쾌하게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벽한 심증이 있는것처럼 보여도, 그 의도를 짐작만 할 뿐인 우리는 그 애매한 경계에 대한 자신없는 토론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나 다른 답을 갖고 있을, 더 근본적인 질문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음악에서 유사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모든 것은 과연 표절인가? 예술가가 다른 이의 작품을 모방하고 따라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반드시 비난받아야 마땅한가? 쉽게 답할 수 있다면 거짓말이다.

 

매번 똑같이 나오는 지적이지만, 표절은 근본적으로 지적재산권의 침해에 관한 법률적인 다툼이다. 쉽게 말해 남의 것을 베껴 부당한 이익을 침해한 행위에 대해 피해자에게 뒤늦게라도 응당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그 핵심인데, 흥미롭게도 대중들은 이같은 법률적 논쟁에 대해 대체적으로 무심한 편이다. 해외에선 ‘표절(plagirism)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보다는 ‘저작권 침해(copyright infringement)’라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 선호된다. 몇년전 로빈 시크와 퍼렐 윌리엄스가 마빈게이의 음악을 표절했다고 법원이 판정했을때에도 ‘베낄 의도가 없이 단지 분위기를 빌렸을 뿐’이라는 윌리엄스측의 의견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할 결심’을 오히려 작곡가들이 밝혔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모방에 대한 의도를 분명히 함으로서 그것이 원곡을 베낀 행위와는 다른 성격의 행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결국 그들이 마빈게이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보았고, 그에 따라 “Blurred Lines”라는 곡의 크레딧에는 마빈게이의 이름이 뒤늦게 등록되었다. 법정이 시크와 퍼렐에게 지불하라고 명령한 7백만불은 고작 푼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퍼렐은 법정을 나가며 배심원들을 ‘음알못’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60년대 미국 팝 음악의 가장 위대한 재능 중 한명인 브라이언 윌슨은 비치보이스의 불멸의 명곡 ‘Surfin’ USA’를 만들면서 척 베리의 곡 ‘Sweet Little Sixteen’ 위에 가사를 붙였다. ‘번안곡’이라 불릴만한 행위였지만 정작 척 베리의 이름은 최초의 크레딧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의도와 상관없이 표절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윌슨측은 논란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위해 본인이 직접 쓴 작사부분을 포함한 해당곡의 저작권을 베리와 나누고 작곡가 크레딧에도 베리의 이름을 뒤늦게 올리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나름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도 많은 이들이 이 곡을 들으며 ‘천재’ 윌슨과 비치보이스의 위대성을 찬양한다.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표절이 아닌 것일까?

 

가요계의 표절시비는 이보다 더 많은 층위가 뒤섞여 있어 담론의 성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현재 케이팝은 외국 작곡가들의 곡을 사와 리메이크 하는 형태로 표절시비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듯 하다. 설령 어떤 외국곡과의 표절시비가 불거진다고 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양산형 국내 전문 작곡가들의 곡도 종종 표절혐의에 오르지만 대부분 크레딧과 로열티 문제를 정리함으로서 조용히 해결되곤 한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전문적인 영역은 애초에 논쟁도 벌어지지 않고 분노도 유발하지 않는 법이다. 대중들이 유독 분노하는건 한국 뮤지션이 어느 외국 뮤지션의 것을 몰래 ‘따라했다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표절에 대한 판단과 저작권에 대한 논의일까. 우리는 단지 괘씸죄를 묻고 있는건 아닐까. 외국 것을 몰래 갖고 와 재능있는 작곡가의 명예를 얻은 ‘불공정’에 대한 분노 말이다.

 

유희열을 비롯한 90년대 뮤지션들의 표절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정말 원작자의 정당한 권리를 우려하고 있는건지 혹은 정확한 로열티 계산과 크레딧 정리에 대한 입장을 촉구하는건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혹시 그보다는 그 어떤 ‘천재’ 작곡가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가요계가 이렇게 썩은 곳임을 사람들이 이제라도 깨닫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표절시비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선의도 충분히 이해한다. 귀기울여볼 지점도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표절이 무엇이고 왜 문제이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가요계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다지도 많은 혐의곡이 있음을 아카이빙 하는데에 집착하고 있다. 그같은 아카이빙이 자극적이고 이해하기 쉽지만 생산적인 방식이라 보긴 어렵다. 그런 방식으로는 몇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대신 더 많은 문제를 뒤로 숨게 만들 수 있다. 케이팝을 무분별하게 표절하는 외국곡들, 아마추어의 곡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기성 작곡가들 등 어찌보면 더 중요한 문제들이 널려 있다.

 

나는 누군가의 표절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이 문제가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나 음악신의 자성을 촉구하는 형태로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다소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보일지언정, 평론가의 언어가 ‘사이다’로만 점철되서는 안된다고도 생각한다. 표절시비는 언제든 또 일어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또 누군가의 아름다운 청춘은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 하지만 표절에 대한 담론이 더 성숙하지 않는한 –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 우리는 또다시 지리한 논쟁을 반복하게 될 것이며, 또다시 허무한 결론만이 고장난 오디오처럼 되풀이될 것이다.

 

늘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고, 좋은 의미로 베끼는 행위가 반복되어 이루어진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표절시비는 불가피한 본질적 일부다. 난 이것이 결코 무기력하거나 패배주의적인 결론이라 보지 않는다. 침해당한 저작권이 있다면 돈과 명예 두 가지 모두에서 보상을 받아야 하고, 힘없이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재능과 그들을 통해 부당한 권세를 얻은 사람들은 그에 어울리는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이것이 명확한 기준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한채 단지 하나의 놀이처럼 철지난 가요들의 표절행각을 찾아내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작업일 것이다.

 

 

 언론사 인터뷰 내용(김혜영의 뉴스공감 23년 12월 25일 )

나쁜 말 하는 거 되게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좀 논란이 됐었던 거 꼽아보자면 올 초에 작곡가 유희열 씨의 표절 관련 이슈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는 굉장히 열심이지만 과연 그게 어떤 문제이고 실제로 정말 그랬는가라는 거를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것에는 게으르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저도 그런 반성을 많이 했는데 유희열 씨가 물론 그런 일을 통해서 방송도 하차를 하시고 했지만 정작 전문가가 이 사건에 붙어서 과연 표절이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유희열이 한 행위를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표절이고 어디까지가 모방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분석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론에 등을 떠밀려서 혹은 남들이 비난하니까 나도 같이 비난하는 정도의 일회성의 이슈몰이에 그쳤거든요. 굉장히 아쉬웠고요. 비슷한 맥락으로 연예인 관련한 마약사건. 이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사람들은 정말로 진실을 궁금해 하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바쁜가. 이러한 반성을 한 번 해봐야 합니다. 진실은 진실대로 밝혀져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가. 선정적인 보도와 아니면 말고 식의 비난 같은 것들이 또 누군가의 삶을 망치고 있지 않은가.

 

이게 그래서 결론이 어땠나. 이건 관심이 없고 이미 사람들이 그걸 관심을 가질 쯤에는 이미 지나간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언론에 계신 분들 반성을 해야 할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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