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 1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진보, 무엇이 문제인가
※ 글을 쓰기에 앞서...
앞으로 제가 올릴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는 노회찬의 저서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를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책의 구절들을 첨부하면서 제 개인적인 의견을 첨부하였습니다.
진보는 커녕 민주주의란 단어를 쓸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두 차례의 군사반란으로 인한 군부독재 정권은 북한이란 외부의 적을 통해 반공(反共)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민주화 세력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탄압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국가적으로 판매가 금지되었다. 언론은 검열을 통해 철저하게 정부의 선전매체 역할을 했으며 각종 문화예술 발행물들도 국가의 제재를 받았다. 1975년 유신 독재의 긴급조치 9호로 인해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금지곡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노래 가사 중 "태양이 묘지위에 붉게 떠오른다"에서 '붉은 태양'이 김일성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끝으로 한국은 군부독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일반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등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상 국가로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민주정의당을 필두로한 군부독재 세력은 몰락하지 않았고 YS, JP와의 3당합당을 통해 자칭 ‘보수’정당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보수가 있으니 반대편에는 진보도 있는 법. 당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실질적으로 그 몫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평화민주당과 그의 후신인 민주당계 정당은 개혁정당이라고 볼 수 있어도 이념적으로는 진보정당이라고 보긴 어렵다.
대한민국과 브라질은 현대 정치사를 놓고 비교해보면 교집합이 존재한다. 1964년 미 국무부의 지원을 받은 카스텔루 브랑쿠는 군사 쿠테타를 통해 군부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군부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브라질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20년간의 군정이 끝을 맺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개혁주의 대통령을 배출하는 동안 브라질은 2002년 확실한 좌파 성향의 룰라 대통령을 배출했다. 두 국가는 민주화라는 역사 책의 한 쳅터를 마무리 지었고 다음 장을 넘겼지만 정반대의 내용이 적혀있는 셈이다. 무엇이 갈림길을 만들었을까. 노회찬은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2000년 5월 하버드대와 버클리대의 노동정치학회가 공동으로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과 브라질의 노동운동가를 한 명씩 초청하여 발표 하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한국측 발표자로 초청되었는데, 이 심포지엄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진 문제는 ‘한국과 브라질은 비슷한 시기에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폭팔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왜 그 후의 과정은 전혀 다르냐’하는 것이었다. 즉 브라질 노동운동은 곧바로 정치세력화로 활발하게 나아갔는데, 한국은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나 제도 개선보다는 임금 문제 등 개별 자본과의 투쟁에 매몰되어 있나 하는 문제였다.
...(중략)...
우리도 브라질처럼 789 노동자 투쟁의 힘으로 즉각 정치세력화에 나서야 했다. 정당을 만들어 정당으로 대응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6월 항쟁 세력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연대하고 견제하면서 함께 전진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이를 훗날의 과제로 미루고 경제투쟁에만 매몰됐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中 -
이러다보니 노동이란 문제는 보편적 의제가 아닌 특정인의 문제 즉, 개별 당사자들의 문제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기업 노조는 계속해서 좋아졌지만, 싸우기도 힘들고 노동조합 만들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방기됐다. 노동문제가 보편적 문제가 아니라 힘 있는 사람들의 ‘철밥통’을 지키는 운동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략)... 노동자 운동이 아니라 종업원 운동으로 전락했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中 -
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대표주자인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표주자인 소련의 패권 경쟁으로 인한 냉전과 그 여파로 발생한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 때문에 한국은 진보라는 새싹이 태어날 수 있는 지반(地盤)이 약해지긴 했지만 민주화 이후 그 지반을 충분히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던 기회와 시간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골든 아워(golden hour)을 놓친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내부적인 문제 또한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합법적 진보정당이 창설된 것은 1990년 11월 이었다.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정당은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92년 14대 총선을 계기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때 민중당을 탈당한 일부 세력들은 한나라당으로 간 것은 아이러니.
이후 노회찬이 이끄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한 채 분열을 거듭했고 잔존세력이었던 노동운동 그룹은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를 만들면서 진보정당 창설의 목표를 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민노련과 민중당의 불발은 왜 발생한 것일까. 노회찬은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
“(노동운동세력은) 합법정당으로 기능하고 있는 민중당과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추친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한국노동당 그룹이 과욕을 부렸다고 본다 과욕을 부려 쪽수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中 -
노회찬은 민중당이 실패한 원인을 3가지로 본다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민중당이 실패한 요인을 세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는 민중민주운동을 기반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한 정파의 힘으로만 출발한 것이다. 이것이 민중당을 내내 괴롭힌 문제였다. …(중략)… 독자정당노선을 적대시하는 운동권 내부의 대립과 반목이었다.
두 번째는 민주노총의 지지나 지원을 얻지 못한 점이다. …(중략)… 당시 전노협, 업종회 등의 공식 노동조합의 지지나 지원을 얻지 못했다. 정파적 지지만 있었을 뿐이다.
세 번째는 선거제도와 국가보안법 등의 제도적 문제였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제도적 문제는 앞으로 싸워서 고처나갈 문제였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中 -
그렇다면 노회찬이 지적한 정파의 문제란 무엇일까?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나온 구절을 인용하면서 당시 시대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해보자.
“1983년 5월 군에서 재대하고 보니, 나는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말고는 읽은 책이 별로 없는 ‘학습 지진아’였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트로츠키 등 유럽과 중국 사회주의혁명가들의 영문판과 일본어판 책과 논문을 싸들고 문경새재에 있는 시골마을에 들어가 석 달 동안 고시 공부하듯 읽었다. 그런데 하산해보니 세상은 더 멀리 가 있었다. 내가 읽었던 논문은 모두 유행이 지났고 주체사상 학습이 새로운 흐름이 되어 있었다.”
- <나의 한국현대사> 中 -
12.12 사태와 5.17 비상계엄 확대를 거치면서 전두환은 제2의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하였고 군부독재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고 이제는 혁명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생각이 만연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해외의 사회주의혁명이론을 공부하면서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이론을 기반으로 투쟁의 무기를 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6월항쟁을 끝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더 이상의 군부독재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걸 모든 국민들이 알았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국민들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정상적인’ 투표를 통해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들의 대표를 선출했다. 그런데 이것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 또한 존재했다. 일부 운동권 세력 등은 여전히 관념속의 혁명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1987년 이후 특히 1990년 이후에는 달라져야 했지만 잘못된 신념과 이론이 이를 막았다. 소련은 망했지만 북한은 망하지 않았다는 생각, 여기에 총파업 만능주의에다 이상한 노동자주의까지 가지고 있었다. 노동조합 중심, 파업 만능의 생디칼리슴 등 이런 것이 반정치, 반정당으로 이어졌다. ...(중략)... 내가 진보정당을 만들자고 하면 산별노조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진보정당을 만드냐고 했다. 산별노조는 고도의 노동자 계급의식이 있어야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관념적 발상이 운동을 잘못 이끌었다.
...(중략)...
조건과 상황이 바뀌면 과학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나는 레닌이 그때 한국에 있었다면, 그가 제일 먼저 (노선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레닌, 레닌’하는 사람들은 안 바뀌겠지만.”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中 -
진보진영은 보수, 온건 자유주의 진영보다도 그 폭이 좁다.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고 국민의당을 신설한 뒤 교섭단체 이상의 원내정당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과는 상반된다. 그렇기에 진보진영은 뭉처야 한다. 아니 뭉처야 했다. 그러나 정파의 문제라는 내부적 갈등으로 유야무야(有耶無耶)되었다. 이것이 노회찬이 말했던 민중당이 실패한 첫 번째 이유이다.
진보정당의 창설 실패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냉전의 여파 그리고 반공적 독재정권의 집권으로 인해 진보진영의 역사가 늦게 출발한 점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 이후 정당 창설을 위한 내부적 결속이 늦어진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투표가 곧 전투이자 전쟁이다. 오늘날 국민의힘 혹은 더불어민주당 같은 큰 정당이 왜 투표에 목숨을 거는지 알아야한다. 투표에서 지면 모든게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이 원내에 처음으로 입성한 시기는 2004년이었다.
사실 진보진영 내부적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보다 많다. 그리고 이것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진보진영이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