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기
  • 아래로
  • 위로
  • 목록
  • 댓글
기존 문서

(강스포) 신카이 마코토 최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리뷰 - 재난과 상실, 그리고 극복

알렉산드르_뷰코크 알렉산드르_뷰코크 97

3

4

命がかりそめだとは知っています。
목숨이 덧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死は常に隣にあると分かっています。それでも私たちは願ってしまう。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기원합니다.
いま一年、いま一日、いまもう一時だけでも、私たちは永らえたい。
앞으로 1년, 앞으로 하루, 아니 아주 잠시라도 저희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4살 스즈메의 일기장 속 3월 11일은 2011년 3월 11일로, 얼마 전에 12주년을 맞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날입니다. 스즈메의 고향인 이와테 현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합니다. 스즈메는 그날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거기에 스즈메가 작중에서 방문한 에히메, 고베, 도쿄, 후쿠시마, 이와테라는 지역들도 각자 다른 재해로(후쿠시마랑 이와테는 같은 원인이지만) 인해 피해를 입은 곳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에게 스즈메가 거쳐간 장소들은 하나하나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 내지는 현상인 '미미즈'는, 일본이라는 '불의 나라'가 땅에 가진 강렬한 힘의 현현으로 묘사됩니다. 에너지가 쌓이다가 한번에 터지면서 지진이 발생한다는 과학적인 현상과 작중에서의 묘사를 통해 미루어보면, 이는 특히 지진이라는 재해에 대한 신화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때문에 문을 닫는 자들인 '토지시'들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문을 닫는다는 것은(소설판을 읽어봐야 더 알겠다만) 위의 인용구와 같이 '더 오래 살고 싶다는 기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난을 겪은 이후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람의 의지가 표현되는 곳은 아닐까 싶습니다.

 

 재난, 상실, 그리고 극복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렇게 세 키워드를 따로 놓고 보면 스즈메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재난을 겪은 모든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스즈메가 어떻게 이를 극복하였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재난이 하나 일어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재지변의 경우라도 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스즈메의 고향인 이와테 현에도 쓰나미라는 재해로 다시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문을 쌓아 결국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마을 사람을 지켜낸 위인이 있죠. 후다이무라의 기적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합니다. 조금 부정적인 면으로는, 쓰나미에 휩쓸렸는데도 무사한 나무에서 굳은 의지를 느끼고 기념관을 조성했지만, 알고보니 이미 죽은 나무에 분칠을 한 것이었다는 일화도 존재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는 재난 이후 재발을 막기 위한 갖은 노력으로 재난을 이겨내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죠.

 

 그럼 '재난으로 인한 상실'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상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결국 새로운 인연을 맺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스즈메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새로운 만남,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만남은 소타였던 것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 둘을 동시에 '문을 닫는다'는 행위를 통해 전달합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은 재난과 복잡한 사정, 일상을 영위하고는 있지만 지진경보가 일상인 일본에서 계속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스즈메에게 '그 지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란 운명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만난 소타에게서 스즈메는 잘생겼다는게 가장 크지만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얻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문을 닫는 과정 자체가 스즈메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 극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 소타가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은 일로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스즈메의 트라우마를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극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다거나 하는 일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라는 지적에 대한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아니 뭐 그럼 사실 춘향전부터 말이 안되는거겠다만은서도) 다시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막무가내로 소타를 구하는 여정에 뛰어들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스즈메 자신의 내면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해내는 것과도 맞닿아있습니다. 고향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있던 그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알던 그곳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모의 난입은 스즈메 내면의 마지막 응어리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스즈메가 자신의 아픔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겠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받은 애정만큼 컸던 상처를 풀어내는 것은, 마치 신을 배알하기 전에 몸을 가지런히 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 라고 말을 거는 것은, 아무래도 3월 11일 그날 '다녀오겠습니다' 에 상응하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제게는 그 말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겠다는 주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이면 유가족 부모님들께서 만드신 합창단에서 사람이 오셔서 공연과 함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 또래인 아이들을 보러 오신 용기 등이 항상 뭉클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즈메가 한 '문단속'도 결국은 이런 일입니다. 나아가기 위해서, 멈춰있지 않기 위해서 봐야만 하는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내일의 스즈메가 그날의 스즈메에게, 결국 사랑을 하고 결국 훌륭한 어른이 되어간다고 격려해 준 것은,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그날의 스즈메가 계속 어머니를 찾아오던 것은, 상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위로였을 것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런 면에서 재난을 겪은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소타와 스즈메는 재회하지만, 바로 그들이 사랑의 결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일상으로, 일로 돌아가야 하는 과정이 먼저 자리해 있죠. 감독의 전작 날씨의 아이가 '세상이 어찌되든 좋아,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 라는 세카이계적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이번 작품은 '힘들고 어렵고, 상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지금의 삶과 너를 소중히 여기고 싶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했기에 나온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이 소중하기에 비일상은 끝나고 다시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서, 언젠가 있을 즐거운 만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진부한 타다이마-오카에리 엔딩이 꽤나 유효하게 먹힌 라스트 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의 재난 삼부작 중에서 이 작품은 특별하게도 감독의 이전 작품들의 테이스트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상의 소중함, 새로운 만남의 소중함, 사랑의 소중함. 현대인은 어디까지를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가. 거기에 더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찌 대처하여야 하는가가 재난 삼부작의 의의였고, 스즈메는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방법으로 잃어버림을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그 극복을 이야기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점 9.5/10

신고공유스크랩
4
1
이걸 초딩들이 봤다는게 신기함.
23.03.19. 20:28
profile image
zerosugar
그런 트라우마적 내용을 생각하지 않아도 적당히 재밌는 영화라고는 생각함

그리고 뭐 결국 연출력이 흡입력 좋아서 보고나면 뭔가 집중빡되는느낌이고...
23.03.19. 21:51
profile image

정말 글 잘읽었습니다 글만 읽어도 여러감정이 많이드네요

23.03.20. 02:30
댓글 등록
취소 댓글 등록

cmt alert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목록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