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기, 과거와 현재 그리고
※ 예전에 디시에 적었던 글인데 수정보완해서 여기에도 한 번 올려봅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비핵화를 제안하는 국가는 북한이 아닌 '남한'이라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1950~80년대 비핵화를 제안했던 국가는 남한이 아닌 '북한'이었다. 1956년 11월 제 12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북한은 ‘조선반도 핵무기 반입반대 결정’을 하였고, 1986년 6월 23일에는 정부 명의로 ‘조선반도에서 비 핵지대, 평화지대를 창설할 데 대한 제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남한의 극우반공세력은 과거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를 연상케하는 반공 선동과 날조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남북간의 군비경쟁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에서 미국과의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놓고 팽팽한 기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승만 정권에서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해 적극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고 이와 같은 남한측의 거센 반발은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의 핵무기 반입'이라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사실 중재안이라는 표현도 무색한 것이 한반도 핵무기 배치는 미국의 독단적인 판단과 진행 아래 이루어졌다. 1953년 맺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제13항 ㄹ목에 의거해 한반도 외부로부터 어떤 작전무기도 증강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의 안보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전협정 당시 무기 도입을 중립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구성한 중립국 감독위원회 감시위원들을 1956년 6월 추방했다.
미국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통해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줄여야 했고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대규모의 남한 병력도 감축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거세게 반대하자 그를 무마하면서 병력을 줄이는 대신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늦어도 1958년 1월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정전협정 위반이었다.
- 프레시안 '북한의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中 -
심지어 1957년 6월 미국은 정전협정 제13항 ㄹ목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는 등의 일부 조항을 폐기하였다. 당연히 북한측은 미국이 남조선을 핵전쟁 기지로 만든다고 비판하였고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UN 회원국이 아니었던 북한을 대신해 UN총회에서 같은해 11월 이에 대한 비판 성명문을 발표하였다. 결국 북한은 남한의 핵무기 배치에 대한 대응책을 구비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아래와 같은 4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첫째, '북한의 4대 군사노선' 가운데 하나인 '전국토의 요새화'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쉽게 말해 '땅굴 파기'다. 김일성이 1963년 온 나라를 요새로 만들면 "원자탄을 갖지 않고도 원자탄을 가진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며, 전선 지역뿐만 아니라 후방 지역에도 주요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까지 지하에 건설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중략)...
둘째, 미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기 어렵게 북한군을 휴전선 근처에 전진 배치시켰다. 이른바 '적 껴안기' 전략으로, 김일성은 남북의 병력이 서로 뒤섞여 전투를 하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셋째, 북한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1963년 소련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소련은 핵무기 개발은 도와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한편, 우방국인 북한을 달래기 위해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개발은 지원할 수 있다며 1965년부터 영변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중략)...
넷째, 1964년 중국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자 김일성은 베이징에 대표단을 보내 북한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편지를 보내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형제 국가끼리 원자탄의 비밀을 공유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북한 같은 조그만 나라가 핵무기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며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 프레시안 '북한의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中 -
이와 같은 북한의 대응책에도 불구하고 냉전으로 얼어붙은 국제 정세는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1965년 베트남 전쟁 등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간의 갈등은 물리적 충돌까지 이르렀다. 한반도의 냉기 또한 국제 정세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74년 박정희는 자주국방이란 명분하에 프랑스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이에 맞서 당시 북한도 중국에 핵무기 개발 협조 요청을 거듭 요청했지만 중국은 거부하였고 1970년대 후반부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는 '나는 베트남에 30만 명을 보냈다. 그런데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0년대 동북아시아에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민들을 고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건 남한이다."
- 1970년대 당시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인터뷰 中 -
19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닉슨은 새로운 외교정책인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였고 냉전으로 인한 정치적·군사적 긴장감은 급속도로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데탕트(Détente)의 분위기 속에서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고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을까?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 '철수'를 발표했지 핵무기 '금지'를 선언하지 않았다. 즉, 미국은 본인들의 군사외교적 이익에 따라 남한과의 '핵우산'이란 관계를 통해 언제든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반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북한은 핵무기 '우산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과 중국은 북한에게 핵무기 지원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미국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2000개 이상의 핵무기는 모두 철수하더라도 해군 핵무기는 "적당한 때에" 재생하거나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고 핵무기 저장시설도 유지하도록 했다. 그리고 2014년 현재까지 남한에 대해 지속적으로 '핵우산'을 제공할 것을 다짐해왔다. ...(중략)... 이에 반해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든 중국으로부터든 핵우산을 제공받은 적이 없다. ...(중략)... 북한만 자체 핵무기도 없고 다른 나라의 핵우산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북한의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中 -
설상가상으로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을 앞서게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가 커지면서 북한은 남한과의 재래식 군비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예컨데 1976년 남한은 국방 예산을 2배로 늘리고 이후 3년 동안 해마다 군비를 대폭 증강했다. 국내총생산량(GDP) 대비 국방비에 지출하는 비율은 과거와 현재를 통트렁 북한이 남한보다 크지만, 순비용을 놓고 따졌을 때는 1970년대 말부터 남한의 국방 비용은 북한보다 약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북한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안보 효과를 얻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핵무기 개발을 통해 국방비를 절감한 차액을 경제개발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 처하게 되면서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대략 미국의 600분의 1 수준이고 남한의 30분의 1 수준이며, 북한 군사비는 대략 미국의 200분의 1 안팎이요, 남한의 10분의 1 안팎으로 추정된다. 빈약한 경제력 때문에 전투기나 함정 같은 재래식 무기경쟁은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자,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 (WMD)를 개발해온 것이다. 대량파괴무기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면 안보에 대한 걱정 없이 재래식 무기 유지 및 증강에 들어갈 비용을 경제개발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북한의 핵무기, 언제부터 왜 만들었는가' 中 -
2001년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조지 부시(George W. Bush)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고 불량국가에 대해서는 선제 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더불어 2003년에는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 공격 시나리오가 세간에 퍼지면서 전쟁위기가 조성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행위를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은 바그다드 폭격을 시작으로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를 구실로 이라크를 무장해제하여 중동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2004년 10월 미국 CIA를 주축으로 구성된 이라크 조사단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정당성 마저 잃게 되었고 수많은 민간인과 전쟁터로 끌려간 무고한 청년들의 희생은 흰 종이 위의 검은 숫자로 변하면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미국을 ‘선’(善),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에 반하는 국가들을 ‘악’(惡)으로 규명하였다. 심지어 그 기준도 자의적이었다.
한반도라고 해서 그 얘기가 달라질까?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 미국의 남한 핵무기 배치 전략을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1976년 2월부터 시작된 연례 한미합동 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Team Spirit)'는 대대적인 핵무기 사용 훈련을 포함하고 있다. 굳이 핵무기 사용이 아니더라도 미국은 북한을 '제거'하는 군사작전 또한 구상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한미연합사령부는 유사시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 북한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골자로하는 작계(작전계획) 5027을 만들었다.
이후 북한의 급변사태(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외부 유출, 권력승계 실패, 대규모 탈북사태, 남한인 인질사태 등)와 같은 새로운 위험에 대비한 작계 5029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작계 5029를 거부하고 군사적 대응조처를 명시하지 않은 '개념계획'을 만드는 것으로 미국과 타협안을 조성했다. 그도 그럴것이 작계 5029도 결국 북한을 제거 대상으로 전제하고 만들어진 군사작전이기 때문이다.
2022년까지도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국에게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제거하는 목적을 지닌 군사작전을 수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미국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유출을 구실로 군사작전을 감행한다는 발표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군사작전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미국은 자국에 대한 터러 위험을 내세우며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정당화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남한까지 작전에 개입하면서 전쟁의 양산으로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영화 각본에서나 존재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가?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작계 5029가 북한을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보는 관점에서 만든 군사작전계획임을 북한은 안다. 2008년 이후 DMZ와 해상경계선 근처에서 한미 해군과 육군이 연합훈련을 할 때 미국이 최신형 무인정찰기와 폭격기를 투입하고 대규모 상륙훈련을 하는 것을 북한 당국이 격렬하게 비난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흡수통일을 노리는 침략계획'으로 여긴 작계 5029에 따른 연습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 <나의 한국현대사> p.408 -
이라크 침공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핵무장 포기 이후 정권의 몰락, 2014년 우크라이나 합병 등을 놓고 봤을 때 북한 입장에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북한은 이라크 침공 뿐만 아니라 과거 미국이 과시했던 혁신적 군사기술과 한국의 재래식 무기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핵무기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선제 공격’이 아닌 ‘체제의 안전한 보장’이다.
“우리의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의 전쟁억제력을 키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 202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 中 -
이를 두고 "북한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냐"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북한이 체제의 보장을 받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에 일부 동의한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평화를 운운하면서 속으로는 남조선 인민해방전쟁을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현재는 그들도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북한은 조선노동당 규약에서 ‘북 주도 혁명통일론’ 문구를 지난 2021년 1월 전당대회에서 삭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18년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와 한국전쟁 당시 미군 유해 반환 이후 한 층 더 진일보된 관계개선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남북평화통일에 있어서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회담을 통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북한을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로 불러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거부하는 듯 했다. 2018년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미군 유해 반환 등의 관계개선 의지를 보여주었던 북한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된다.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유일한 해법이자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기 때문이다.
북미관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수준이다. 비록 향후 일정 시간동안 넘어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북미관계 개선과 남북 평화통일이라는 대원칙은 포기할 수 없다. 북한과 미국 더 나아가 남한도 상호 신뢰를 차근차근 구축해 나간다면 한반도의 전쟁 위협은 사라질 것이고 미국도 북한을 정상국가로 인정할 것이다. 현재 세대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반도에서 태어날 미래세대를 위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의 길을 걷는 것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우리 민족 모두에게 통일 그 이상의 가치를 전해줄 것에 믿어 의심치 않다.
출처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9317?no=119317#0DKU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9974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