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도리, 위상, 그리고
논어 자한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같이 배울 수는 있어도 같이 도에 나아갈 수 없으며, 같이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같이 설 수 없으며. 같이 설 수는 있어도 같이 권(權)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극도로 짧고 함축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논어에는
'이게 무슨 소린지는 대충은 알겠는데 정확한 뜻인진 모르겠는' 문구가 무더기로 등장하지요. 요 구절이 딱 그렇습니다.
주석가들은 대체로 이 구절이 공부의 단계를 표현한다고 풀이합니다.
다 똑같이 배운다고 해서 모두 같은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 구절은 성적이나 커리큘럼의 차원이 아니라 도덕, 더 구체적으로는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배우기(學) → 도리를 알기(適道) → 뜻 혹은 입지를 세우기(立) → '권'하기(權)의 순서대로, 인간은 4단계에 걸쳐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공자의 엄숙한 이미지와 달리, 가장 중요한 4번째 단계인 '권'이란 임기응변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권의 용례를 더 잘 알려 주는 구절은 맹자에 등장하는데,
순우곤이 맹자에게 물었다. “남녀끼리 손을 닿게 하지 않는 것은 예(禮)입니까?”
답하길, “예다.”
순우곤이 물었다. “형수가 물에 빠졌어도 손으로 잡아 건져야 합니까?”
답하길, “물에 빠진 형수를 구하지 않는다면 승냥이나 이리와 같다. 남녀끼리 손을 닿게 하지 않는 것은 예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잡아 건져 주는 것은 권(權)이다.”
비록 규범에는 어긋나더라도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택하는 임시방편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자-맹자의 학통에 걸쳐서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하는 임기응변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며
설령 똑같은 스승 밑에서 똑같이 배우고, 똑같은 도리에 입각하고,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고 해도
이 구체적인 임기응변의 내용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임기응변을 잘한다는 것은 배움의 최종 단계에 있는 것인 동시에, 금수와 인간을 가르는 선입니다.
같은 대학에서 배우고 같은 전공으로 출세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행동이 형편없다면, 배움, 도리, 위상을 다 갖추었어도 금수 같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정약용은 권을 가리켜, '저울질을 잘하여 중용을 얻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학벌로 빨 거면 아무리 봐도 이탄희가 낫지 않냐는 빡침 때문에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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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작위한 혼돈의 연속이죠. 여기서 단일한 준거 하나로 모든 것을 해쳐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은 각주구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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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하고 정제되지 않은 글에 호응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치만 전공을 밝히면 신상정보 노출 우려가 있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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