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생각하는 게
그 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주도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평가도 전부 달라집니다.
가끔씩 재벌, 언론, 기득권에 대한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제가 항상 떠올리는 게 문화대혁명이고요.
우선,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 초기에 대외적으로 내세운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낡은 사상, 문화, 풍속, 관습을 타파하고 현실 사회주의에 기반한 이타주의적 및 자기 희생적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 여기까지만 들어 보면 이 시기에 일어난 광기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호죠.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공산주의적 관점을 제거하고 보더라도 아직 전근대적이고 차별적인 옛 악습이 농촌 등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물론 상하이나 베이징 등의 지식인들이 많고 과거 국민정부의 통치가 직접적으로 닿았던 대도시는 어느 정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웠으나, 중국은 도시보다 농촌의 인구가 훨씬 많았기에 대대적인 개혁 자체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여태까지 이루어지지 않던 개혁을, 마침내 '마오 동지와 공산당이 이뤄낼 것' 이라고 좌파 지식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홍위병들에게 한없는 자유를 부여한 순간부터 '개혁' 이 아닌 '학살'과 '파괴' 로 변질되었고요.
티베트부터 상하이까지 모든 절을 때려부수고 다닌 탓에 산스크리트어 불교 경전 원본은 유실되었고, 그 지식인들이 모여서 살던 대도시인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조금이라도 '봉건적이고 자산계급 민족주의자 같은' 사람이 보이는 대로 홍위병들이 달려가 린치를 하고 살해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린치와 살해를 당한 사람들 중에선 개혁을 간절히 원하던 지식인들도 당연히 섞여 있었죠.
물론 긍정적인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죠.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촌락의 유교적 질서가 완전히 박살났고, 세는 나이가 사라지고 만 나이가 일상에서 정착되었으며, 관료제에 대한 타파가 활발히 논의되었고, 전족 같은 악습이 사라졌으며 문맹률이 크게 줄어든 것은 팩트입니다. 하지만 심심하면 누가 반동분자네, 자산 계급이네, 민족주의자 국민당 간첩 새끼라고 홍위병들한테 끌려가서 린치당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아예 자살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파괴당한 역사와 문화의 대가로는 너무나도 적었습니다.
하지만 저항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조금이라도 홍위병의 심기를 거스르면 ㅈ된다는 심리가 중국인들에게 퍼져 있었고, 이 모든 것은 중국의 최도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지시했다는 아주 튼튼한 명분이 있었던 데다, 중국 공안은 1980년대 덩샤오핑이 치안 안정을 위해 권한을 격상시키기 전까지 지금처럼 막강한 집단이 아니었으니까요. 인민해방군이야 마오쩌둥이 시켰으면 그냥 입 닥치고 있어야 했고요.
결국 하도 개지랄을 떨었던 탓에 마오쩌둥의 권력마저 무너질 위험이 생기자 상산하향 운동- 도시에서 혁명을 완수했으니 이젠 농촌으로 가서 혁명을 완수하라고 모든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추방시켜 굴라그마냥 강제 노동을 하게 시켰습니다. 쉽게 말해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죠.
그래서 홍위병들이 원하던 현실 사회주의가 완성되었을까요? 아니면 최소한 중국 사회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존경을 받고 있을까요? 1976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발생한 1차 천안문 사태(1989년 6월 4일의 흔히 아는 그 사건은 2차 천안문 사태라고 부릅니다.)때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박살난 곳이 홍위병 사무소였고, 홍위병의 패악질이 너무 심했던 탓에 공산당조차 이 건은 숨기지 않고 쉴드를 아예 포기할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홍위병들에게 박살난 중국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덩샤오핑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중국의 빈부 격차와 양극화를 미친 듯이 심화시켜 중국은 더 이상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이다만을 찾으며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척결 대상이라 비난하다간, 결국 민심도 잃고 원하던 결과에도 절대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의 이상만을 찾으며 모든 사람을 민족주의자 자산 계급이라 비난하고 척결 대상이라 비난하던 홍위병들도,
중국인들의 지지와, 역사의 평가와,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사회주의 국가 중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채 버려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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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신들 또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결말을 맞이했으니까요.
그리고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의 혁명 정신은 오랫동안 봉인되었습니다.
때려부수고 찾아오는 건 새로운 낙원이 아닌 황량한 폐허에 불과하니까요.
역사의 아이러니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급진적 개혁을 사회문화체계에 적용하는 것과 경제체계에 대해서 적용하는 건 경우가 다른 문제이지만
글의 취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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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의 사례가 2022년 대한민국에 정치적 은유이상의 경각심을 줄 수 있을까요? 흠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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